Comment2011. 12. 30. 16:49




오늘 새벽 민주통합당 김근태 상임고문의 타계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1971년 부터 시작된 지명수배, 민청련 초대 의장 역임, 그리고 구속...

구속 후 고문기술자 이근안으로 부터 모진 고문을 당했던 민주화 운동의 대부가 세상을 떠나셨네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한 분이 세상을 떠나시고 나니 "고문기술자 이근안"이란 사람이 궁금해 집니다.

당시 경기경찰청 공안분실 실장이었던 이근안은 말 그대로 고민기술자였습니다.

아래 글은 故 김근태 상임고문이 1985년 12월 법정에서 진술한 내용입니다.


본인은 1985년 9월 한 달 동안, 9월 4일부터 9월 20일까지 전기고문 물고문을 각 5시간 정도 당했습니다.
전기고문을 주로 하고 물고문은 전기고문으로 발생하는 쇼크를 완화하기 위해 가했습니다.
 
 
고문을 하는 동안 비명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라디오를 크게 틀었습니다.
그리고 비명 때문에 목이 부어서 말을 하지 못하게 되면 즉각 약을 투여하여 목을 트이게 하였습니다
(어지러운 듯 말을 중단하고 난간을 붙들면서 잠깐 쉬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9월 4일 각 5시간씩 두 차례 물고문을 당했고, 9월 5일, 9월 6일 각 한차례씩의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골고루 당했습니다.
8일에는 두 차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고. 10일 한차례, 13일 …… 13일 금요일입니다.
9월 13일 고문자들은 본인에게
"최후의 만찬이다."
"예수가 죽었던 최후의 만찬이다."
"너 장례날이다."

이러한 협박을 가하면서 두 차례의 전기고문을 가했습니다.
그 다음에
 9월 20일날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한차례 받았습니다.
그리고
 9월 25일날 집단적인 폭행을 당했으며 그후 여러 차례 구타를 당했습니다.
물론 잠을 못 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밥을 굶긴 것도 대략 절반쯤 됩니다.
고문 때문에 13일 이후에는 밥을 먹지 못했고 그 후유증으로 지금까지 밥을 먹지 못합니다.

... (중략) ...

결국 9월 20일이 되어서는 도저히 버텨내지 못하게 만신창이가 되었고, 
 
9월 25일에는 마침내 항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만 더 버티면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더 버틸 수 없었습니다.

그날 그들은 집단폭행을 가한 후 본인에게 알몸으로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쓰라는 조서내용을 보고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근안은 故 김근태 상임고문을 고문한 혐의로 지명수배되어 도피생활을 하다가 1999년 자수했습니다.

7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다 출소한 그는 현재 대한예수교 장로회에서 목회자로 활동중입니다.


고문기술자가 회계하고 목사가 된 것인데...

정말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계한 것일까요?


자신이 "심문 기술자"였다고 당당히 말 하며 이것도 하나의 예술이라고 주장했던 사람입니다.

현재도 목회활동을 하면서 자신이 한행위는 애국이였다고 말 한다는군요. 

이런 사람이 목사가 되어 당당히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면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가 돈 주고 팔던 면죄부가 생각이 납니다.
 
대한민국 기독교의 목사안수 기준은 무엇입니까?

법의 심판까지 받았던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용서 받으려 하지 않는 사람인데도

목사가 될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많이 늦었지만...

이근안 목사가 故 김근태 상임고문의 빈소에 찾아가 참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iSonics